러시아4대 문호 '뚜르게네프'

평범한 글의 대인

존경받는 러시아문호로 기억

김태봉 기자

작성 2020.06.28 14:20 수정 2020.07.02 11:45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 <루딘> 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항상 지명된다. 사실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 , 즉 복수형으로, <아버지들과 아들들>이다. 이는 이상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귀족 계층의 아버지 세대와 혁명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잡계급의 아들 세대들의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대 러시아의 시대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후에 염상섭의 <삼대>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어릴적 투르게네프는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가 일찍 죽고 난 뒤, 오렐 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던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투르게네프를 가르치게 했고 프랑스어로 말하게 했다.반면에 러시아어는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고 러시아어로 된 책은 8살 때 처음으로 보았다.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로 날리게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어머니는 농장을 관리하면서 농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그리고 그녀는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1850년에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에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는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였다.

 

결국 러시아 정부로부터 추방당한 투르게네프는 이후 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그후, 1883년 친하게 지내던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 있는 별저에서 병사했다.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자신이 주창하는 사상이나 작품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당대의 대인배로 알려져있다. 그는 젊고 가난한 작가들의 육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매일 노름에 빠져있던 톨스토이에게 돈을 빌려주고서, 돌려받지 않았다. 나아가 채무자인 톨스토이는 되려 투르게네프를 모욕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실제로 이 문제로 둘은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결투로까지 이어질 뻔했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끝까지 톨스토이와의 우정을 멈추지 않았고 죽는 순간에도 톨스토이를 그리워했다.

 

러시아 문학가들 중 가장 정석적인 작가로, 글에는 큰 특색이 없지만 그 정석적인 문체 덕분에 뭘 읽든 평균 이상은 간다. 일정 이상의 완성도가 담보되면서, 난해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심오하지 않은 대중적이고 무난한 내용에 읽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러시아인들의 투르게네프에 대한 존경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국방군의 침략 때문에 화물칸 열차에 빽빽하게 피난민들이 탔는데, 그곳에는 독일군의 손에 훼손될까 봐 같이 옮겨지던 투르게네프의 소파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파에 안 앉았다고 한다.

 

또한 투르게네프는 생전에도 매우 존경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게네프는 농노 해방령이 선포되었던 1861년에 오렐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한 적이 있는데, 두 명의 농민들이 자신을 찾아와 '러시아 모든 민중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러시아 방식'으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던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편 도스토옙스키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도스토옙스키는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서유럽 문명을 비판했으니 서구주의자에 가까웠던 투르게네프와는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늙으막에 이런 도스토옙스키와 화해했고 마지막에서야 서로 글로 서로가 대작가라고 호평하며 죽기 전에 앙금을 깨끗히 씻었고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는 참가하여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죽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빛나는 러시아 4대 문호>


러시아 4대문호 또스또예프스키,톨스토이,푸쉬킨,뚜르게네프


<4대 문호에 관하여>

러시아에는 크릴로프, 푸시킨, 고골리,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 네크라소프, 체르니셰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숄로호프 등 그야말로 주옥같은 작품의 작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작품에 나온 멋진 장면과 정서를 매우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푸틴 대통령이 말할 정도로 많은 문호들 가운데 19세기 러시아 3대 문호로 일컬어지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는 학창 시절 자주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거기에 4대문호로 푸쉬킨을 넣는 것이 무리일까?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누구하나 추가하거나 바뀐들 문제가 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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