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도와 원진의 사랑 Ⅲ

춘망사(春望詞)

설도, 생애와 흔적

김태봉 기자

작성 2020.06.01 12:47 수정 2020.06.05 10:54

에필로그

그녀는 성도에서 만드는 종이의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곧 완화계의 맑은 물을 사용하고 연꽃즙을 집어넣고 해서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이 종이를 "설도전"(= : 작은 종이의 뜻) 또는 "완화전"이라고 부른다.

 

그 후에 많은 문인들이 이 종이에 대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사회도 산업화로 인해 민간에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거의 사라졌기에 중국에서는 '설도전'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만민속촌(台灣民俗村)에는 과거에 어떻게 종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 관의 이름이 바로 '설도장()'이다.

 

설도는 계속 시를 썼고, 후에,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의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약 45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약 90수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도 당대(唐代)의 어떤 여류 시인의 글보다 많다.

천재 시인 이었던 원진은 여자문제에서만은 花花公子였다고 한다.최앵앵과 결혼 약속을 못지키고 기생 유재춘을 농락하여 자살하게 하고 자신은 재상의 딸과 결혼하고 설도와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이런 소문을 듣고 설도는 풍류객 시인 두목과도 사랑을 하게되나 자기의 나이가 연상인 것을 생각하고 결별을 선언했다고 한다. 설도는 여러모로 황진이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완화계는 두보가 살았던 두보 초당과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함께 살았던 탄금대가 있던 근처로 현재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고,지금도 성도에는 그를 기리는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설도전을 만들 때 사용하던 우물이 설도정으로 명명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묘도 잘 관리되고 있고 설도의 에 대나무가 자주 등장하기에 그녀의 遺墟地望江樓 공원에는 대나무 1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설도를 기념하여 세운 望江樓(성도의 동남쪽 장강의 지류인 금강변 대나무 무성한 곳에 여류 기생 설도를 기리는 망강루가 있음)를 방문한 어떤 풍류객이 읊기를

 

-망강루 아래 강물은 천고에 흐르고

비록 사랑에 울던 설도였지만

천년 세월에도 그녀의 명성 여전하구나-

 

 

설도(薛濤)

중국 송나라 여류 시인이자 樂妓. 소나무 꽃무늬를 새겨 넣은 붉고 고운 색종이를 직접 제작하여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니 그것이 당시 유명한 설도전(薛濤箋)’을 만들기도했다..당대의 원진,백거이, 두목등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 교류.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유명.

 

그리고 그녀는 성도에서 만드는 종이의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곧 완화계의 맑은 물을 사용하고 연꽃즙을 집어넣고 해서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이 종이를 "설도전"(= : 작은 종이의 뜻) 또는 "완화전"이라고 부른다.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난새(鸞鳥)가 되어 버렸다. 조금 다른 얘기에서는 원진이 설도를 만날 때 약 30세의 나이였는데 이미 처가 있었고, 설도를 만난 후 약 2년 후에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 또 배()씨 여자를 들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는 설도에 대해 단지 풍류끼를 발휘한 것이고 처음부터 설도와 함께 맺어질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許均이쓴 설도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등암부용장 향잔비취군)

明年小挑發 誰過薛濤墳 (명년소도발 수과설도분)

부용 꽃 휘장에 불빛이 희미한데 비취색 치마엔 향기 아직 남았구나

년에도 복사꽃 활짝피면 누가 또 설도의 무덤을 찾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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